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 제국 (문단 편집) === 칸과 카간 === 칭기즈 칸 사후 칸이 되었던 '''오고타이 칸이 카간(ᠬᠠᠭᠠᠨ)의 호칭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본래 카간은 칭기즈 칸이 활동할 때까지도 몽골 초원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명칭이었다. 당시에는 이름 뒤에 칸(ᠬᠠᠨ)이라고 부르거나 새로운 칭호와 칸을 부르는 방식이었다. 즉 오고타이 칸이 '''카간의 호칭을 사용한 것은 기존의 형식과 다른 새로운 방식'''이었으며, 이는 몽골 제국의 최고 군주가 '''다른 유목국가의 군주와는 다르다는 관념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또 칭기즈 칸 사후 여러 칸이 난립하였기에 황제와 같은 지위가 된 몽골 최고 지도자에게는 새로운 호칭이 필요하였고, 여기서 채택한 것이 카간이었던 것이다. 몽골 제국에서 카간은 오고타이 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지만 사후 일반명사가 되었다.[* 카이사르가 본래 인명이었지만 사후 황제를 뜻하는 일반명사가 된 것과 같은 것이다.] '''칸과 카간은 유목민족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로 동일한 의미였으나 이후 카간은 수많은 칸을 거느리는 지도자를 뜻'''하게 되면서 중국의 황제와 같은 의미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몽골의 최고 지도자를 칸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칸이 몽골 전체의 지배자를 뜻하는 의미로도 사용된 것이 맞다. 이러한 명칭변화는 몽골 제국의 군주가 표방하는 정치적 이념의 변화와 맞물려 있었다. 카간은 황제와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절대군주이며 그가 지배하고 통치하는 지역적 범위는 초원과 농경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12~14세기 몽골 제국의 시대에 사용된 카간과 6~9세기 돌궐, 위구르 제국 시대에 사용되었던 카간은 동일한 어원이고 의미상으로도 유사하지만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처음의 카간은 칸과 같이 단순한 지배자의 호칭이었기에 복수의 카간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몽골 제국 이후 복수의 카간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카간이 지상의 최고군주라는 의미의 용례는 교황이 파견한 사신이 돌아갈 때 [[구유크 칸]][* 오고타이 칸국의 제 2대 칸이자 몽골 제국의 제 3대 카간]이 보낸 서한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위대한 백성들을 지배하는 사해(四海)의 군주”라고 부르면서 칭기즈 칸과 (오고타이) 카간과 자신은 영원한 하늘의 신이 내린 명령을 집행하는 대리인이기에 교황은 유럽의 여러 왕들을 데리고 직접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고 복속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칭기즈 칸이 건국한 예케 몽골 올로스가 초원지대를 의미하는 유목국가를 벗어나 정주민이 거주하는 농경지대까지 정복지배하는 세계제국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눈에 세상은 칭기즈 칸 일족의 지배를 받아들인 속민과 反민으로 구별되었고 反민에 대한 정복전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칭기즈 칸 사후 몽골족이 수행한 전쟁은 과거와 같은 약탈이 아닌 정복을 통해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던 의지의 표명이었다. 후에 대청(大淸)을 세운 [[만주족]]도 초기에는 지도자를 칸에 해당하는 한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홍타이지 때부터 황제 칭호를 사용하였고 몽골 제국의 옥새를 차지한 뒤에는 카간의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면서 만주족의 한, 몽골족의 카간, 중국의 천자, 티베트의 전륜성왕, 무슬림토후의 이슬람의 지배자를 병행한 동아시아에서 유례없는 동군연합 제국이 등장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